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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151
일 자
18.12.04 23:10:05
조회수
143
글쓴이
최지인
제목 : 자유의 여신상 만든 프랑스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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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에 3850만명이었던 미국 인구는 1900년 7600만명으로 불어났다. 불과 30년 만에 거의 2배가 된 것이다. 이 같은 비정상적인 인구 증가는 당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았던 이민자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전쟁과 독재, 가난 등을 피해 꿈과 희망을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인들이었다.

기회의 땅으로 찾아오는 그들을 제일 먼저 맞이한 건 바로 뉴욕항의 베들레 섬에 우뚝선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이 조각상은 당시 미국으로 건너온 많은 사람들에게 이민의 상징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자유와 희망,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을 처음 만들자고 제의한 이는 프랑스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에드아르 드 라블레다. 그는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과 프랑스의 우정을 기념하는 동상을 만들어 기증하자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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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동상을 만들 작가로 프랑스 출신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선정됐다. 바르톨디는 자신의 어머니를 여신상의 모델로 삼아 얼굴 형태를 만들었다. 자유의 여신상은 전체 높이 93m에 무게가 225t이나 되는 거대한 모습이지만 외형을 이루는 구리판의 두께는 2.37㎜에 불과하다.

이처럼 외부를 얇게 둘러싼 판은 석고 모형으로 만든 단단한 목재 거푸집 안에 황동 판을 넣고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든 다음, 납땜과 못으로 고정해 이어 붙였다. 항구는 원래 바닷바람이 거세게 마련이다. 뉴욕항에 시속 80㎞의 바람이 불면 자유의 여신상은 약 7.6㎝, 그리고 여신상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횃불은 12.7㎝ 움직이게 된다.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고 강한 바람에 버틸 수 있는 비결은 공학자이자 토목기술자인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내부의 철골 구조물 덕분이다. 즉, 자유의 여신상은 속이 빈 강철 프레임 위에 얇게 두들겨 편 구리판을 덮어씌운 조각상으로서, 조각가와 공학자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에펠은 당시만 해도 다루기 쉽지 않았던 강철을 정교하게 연결해 내부의 철제 골조를 만들었다. 자유의 여신상을 제작하면서 쌓은 노하우는 그가 1889년 파리 한복판에 높이 324m의 에펠탑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원래 미국 독립 100주년인 1876년 7월 4일에 공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막식이 거행된 건 그로부터 10년 후인 1886년 10월 28일이었다. 이처럼 제작이 늦어진 건 당시 프랑스와 미국의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서 모금액이 적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국가의 자금이 아니라 두 나라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건설됐다.

모금액의 부족으로 여신상은 1881년에서야 제작이 시작돼 1884년 완성됐다. 완성된 여신상은 350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져 214개의 상자에 담겼다. 그리고 기차로 프랑스의 항구도시 루앙으로 운반된 다음 프랑스 군함 ‘이제흐’에 실려 1885년 6월 미국 뉴욕에 도착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만들기로 약속한 받침대가 완성되지 않아 여신상은 항구에서 상자도 풀지 못한 채 대기해야 했다. 미국 역시 국민들의 모금액이 잘 걷히지 않아 받침대의 제작이 늦어졌던 탓이다. 콘크리트로 만든 별 모양의 받침대는 높이가 47m였으며, 그 위에 46m의 동상이 4개월간의 조립 작업을 거쳐 세워졌다.

19세기 최고의 기술적 성취 중 하나로 꼽히는 자유의 여신상에는 다양한 의미가 숨어 있다. 오른손에 든 횃불은 자유의 빛을 상징하고 왼손에 든 책자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의미한다. 몸을 감싼 긴 옷은 민주주의를 실행했던 로마 공화국을 상징하며, 왕관에 달린 7개의 가시는 7개의 대양과 대륙을 나타낸다. 또 여신상이 밟고 있는 쇠사슬은 노예제도의 폐지를 의미한다.

구리로 만든 여신상은 원래 황금빛이었다. 그런데 군함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는 과정에서 바닷바람으로 인해 빠르게 산화된 탓에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녹색으로 변한 상태였다.

자유의 여신상은 기증 100주년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보수 공사가 진행돼 1986년 7월 5일 일반에게 다시 공개됐다. 공사를 한 가장 큰 이유는 구리와 철의 다른 성질 때문이었다. 철은 습기가 있는 공기에 노출될 경우 구리보다 빠르게 부식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구리판과 철제 보강제 사이엔 석면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석면의 방수가 잘 되지 않아 철이 녹슬어 위험한 상태가 되었던 것. 또한 산성비로 인해 구리 표면이 부식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내부의 철근 골격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대체되었으며, 비바람에 녹슬고 더럽혀진 외벽도 말끔히 손질됐다. 또 유리와 청동으로 만들어진 횃불엔 금박을 새로 입혀 부식을 방지했다.

여신상의 받침대 안에는 제작 과정을 비롯해 사용한 재료와 모형, 도구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또 여신상 꼭대기인 왕관에는 25개의 유리 전망대가 설치돼 있어 대서양과 뉴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전망대에 가기 위해선 엘리베이터로 받침대의 끝부분까지 올라간 다음 354개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런데 9․11테러 사건 이후 안전과 보안상의 이유로 내부 관람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받침대의 박물관은 여전히 개방돼 있어, 유리로 된 천장을 통해 여신상의 내부 구조를 올려다 볼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1924년 10월 15일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56년에는 베들레 섬의 이름이 자유를 뜻하는 리버티 섬으로 바뀌었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자유의 여신상은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화, 그리고 기술적 경이로움에 대한 영감을 주고 있다.


이성규 The Science Times 객원기자  yess01@hanmail.net

출처- http://www.k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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